설교/사무엘상

(사무엘상 5, 6장) 돌아오신 하나님, 경배받으실 하나님

우리본교회 2026. 7. 19. 16:56

https://youtu.be/aYAlTBSwA8s

 

(삼상 5~ 6) 돌아오신 하나님, 경배받으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주신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성막에 있어야 할 언약궤를 끌고 전쟁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납치해 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까지 납치해서 전쟁으로 끌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으셨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전쟁에서 삼만명이란 이스라엘 군인이 죽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언약궤 마저 블레셋에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비극적인 상황을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어가면서 자기 아들에게 이름으로 붙였습니다. ‘이가봇’, -카보드, 카보드: 영광, : 부정접두어, 영광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이 있다고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오늘 5장과 6장에서 보여 주듯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금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십니다.

비롯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말은 못하지만 이용해 먹을 가치가 있는 우상으로 치급하여 하나님께 여쭙지는 않고 전쟁터에 끌고가 그 힘을 이용해 먹으려는 잘 못된 행동들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에게 이용당하기를 거부하시고 오히려 블레셋 적진으로 들어가셔서 온 땅에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시고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해 주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렇지 않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 모든 천사, 모든 피조물이 경배하고 존중하며 영광을 돌려야 할 분이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자기들의 신이 모셔져 있는 신전에 들여 놓습니다. 이들 생각에는 전쟁에 이겼기 때문에 자기들의 신인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 보다 더 강한 신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리품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들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곤 신(우상)이 언약궤 앞에 엎드려져 있는 것입니다. 다곤 신이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금 다곤 신(우상)을 바로 세워 놓았습니다. 그 다음 날이 되자 이 번에는 다곤 신의 머리와 손이 끊어지고 몸 뚱이는 바닥에 내팽겨쳐져 있는 것입니다. 머리는 권위, 권세, 손은 힘과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우상의 권세와 힘과 능력이 모두 하나님의 궤 앞에서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우상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입니다. 우상 스스로가 일어나 앉거나 서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능력을 부여 할 때만 사람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고 스스로 존귀함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상들은 그 권세와 힘과 능력이 다 끊어져 버리고 내동댕이 쳐지는 나무 토막, 쇠붙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우상들을 만들고 섬기느냐?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죠. 불확실한 미래, 그런 불확실한 미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 주길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누군가 채워주길 원하고, 누군가가 자신에 복을 주고 부귀 영화를 주길 원하고 있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고 섬기려고 합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불안,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

그런데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날, 현대 사회에서도 점, 무속 신앙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면 점을 좋아하고 무속 신앙을 의지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끝이 안 좋은 것을 보면 그 점과 무속이라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입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도 이들과 똑 같은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말 못하고 듣지 못하고 그냥 앉혀 놓으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돌 덩어리, 나무 조각, 쇠붙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말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자기 필요한 곳에 세워 놓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우상으로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투에 끌고 온 것을 보십이요. 하나님께 물어 봐야 하는데 듣지 못하는 우상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입 없는 우상처럼, 지혜와 명철이 없는 나무 조각처럼 하나님을 취급하여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옮겨 놓을테니 거기서 나를 위해 힘을 쓰라고 요구하는 우상 숭배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되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귀가 있으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입이 있으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명철이 한이 없으셔서 자신의 뜻대로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어떻게 할까요? 이건 왜 그러지요?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여쭈어 보면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것은 좀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그건 내가 아직 그것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답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입이 있으시고 자기 자녀가 말을 걸어 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가 만든 신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우릴 만드시고 우릴 찿아 오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우릴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신 참 신이심을 믿고 그 분 만이 우리의 미래의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릴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책임지시고 돌보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의 성읍에 독종- 악한 종기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블레셋의 다른 성읍인 가드로 옮깁니다. 그러자 가드 성읍에도 독종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갑니다. 온 성읍 사람들이 이 전염병 때문에 울부짖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무례히 대하고 자신들이 노획물로 빼앗아온 결과로 벌어진 재앙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존중히 여김과 경배를 받으실 분일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높임을 받고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 받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빛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비구름 속에 햇 빛을 전혀 볼 수 없다고 찬란한 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먹구름 때문에 잠시 햇 볕을 볼 수 없을 뿐이지 여전히 태양은 찬란한 햇 볕을 내리 쬐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하나님의 실패로 인식하여 오만 방자하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노획물로 여겨 자기 신의 신전에 들여 놓아 결국 재앙을 불러 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 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전 출애굽 때 있었던 사건을 기억해 냅니다.

삼상 6:6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블레셋 사람들도 출애굽 때 애굽인들이 받은 10가지 재앙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일, 가나안 땅 족속을 그들 앞에 멸하신 일들, 이 모두를 블레셋 사람들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신을 다곤 신으로 섬기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모셔 들이지 않습니다. 단지 재앙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낼 생각과 하나님을 달래 목적으로 독종 모양의 금덩이 5개와 쥐 모양의 금덩이 5개를 선물로 함께 보낼 묘책만 생각해 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신을 대하는 방식인 것이죠. 신을 얼르고 달래서 재앙을 면해 보자. 신에게 치성을 들여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 내자. 조상에게 제사 상 잘 차리고 정성을 보여 자식들 잘 봐 달라고 부탁하자. 내가 이만큼 해 주었으니 당신도 이만큼 해 주어야 한다. 내가 성의를 다하고 정성을 다했으니 노여움을 풀고 복을 주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신 참 신인지 알았으면 다곤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모셔야 하는데 그러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 현대인들 중에도 하나님이 크고 두려운 분,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에서 기적을 보는 것과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종교는 그 사람과 사회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 전체를 바꾸는 일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긴 하지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더 사랑합니다. 자기 삶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싫어 합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다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로(파라오), 그는 열 가지 재앙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결국 죽였습니다.

 

죄인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문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6:44)"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또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믿음은 단순한 정보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기도 응답과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참된 믿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56장의 블레셋 사람들과 사무엘상 7장의 이스라엘 백성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돌려보냈지만 자기 우상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권면을 따라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라"(삼상 7:3)는 부르심 앞에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사람들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재앙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강제로 자기들이 소유했기 때문인 걸 알았으면 속건제물과 함께 그냥 돌려보내면 되는데, 정말인가 하고는 시험을 해 봅니다.

새 수레를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젖나는 소에게 메우고 새끼들은 집에 가두고 이스라엘 성읍인 벧세메스로 가는 길로 올려 보냅니다. 이 소는 얼마나 괴로울까요? 멍에를 메어보지 않고 처음 메어 보니 아플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새끼들에게 젖을 주어야 하는데 새끼를 떼어 놓고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돌아 올 수 없는 길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소들을 잡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니 소들이 눈물을 흘리며 유다 성읍인 벧세메스로 올라갑니다. 이 모습을 보면 참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아무리 짐승인 소라고 하지만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를 떼어 놓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짊어 지고 죽음의 장소인 유다 땅으로 올라가는 암소.

존귀하신 예수님께 너무 죄송스러워 이 짐승을 예수님의 예표라고 하기는 말하기 싫은데, 이 소를 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라요.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요. 하나님의 공의를 알려주는 율법, 십계명의 두 돌판이 언약궤 안에 놓여 있고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된 사람을 위해 속죄제의 피를 뿌리는 속죄소가 이 언약궤 위에 놓여 있어 하나님의 공의와 속죄를 너무나 잘 보여 주는 언약궤, 공의로 죄인을 형벌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로가 쏟아 지는 자리인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친히 오르셔서 대신 진노의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키시고 죄인인 우리를 죄 없다고 용서하시는 사죄의 선포가 이루어지는 자리, 십자가. 언약궤를 끌고 가는 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 이 모습이 그대로 그려지는 것은 우연은 아닌 듯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 것임을 알리시고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시기 위해 멍에 메어보지 않은 암소 두 마리에게 유다 벧세메스로 올라가라고 명하시고 그들은 순종하여 올라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온전한 번제물로 드림으로 그 동안에 있었던 부정함을 씻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7개월간 블레셋에 가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에서 있어서는 안될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삼상6: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여호수아 21:1319는 아론 자손 제사장들에게 분배된 성읍 목록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벧세메스(Beth-shemesh)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곳에 사는 사는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아니면 레위인들이라 율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민수기 4:15 "성물을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민수기 4:20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물을 보지 말라 그리하면 죽으리라.“

라는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앞에서는 블레셋도 죽이고 여기서는 이스라엘도 죽이십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이라고 안봐주시고 이스라엘이라고 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전쟁의 도구로 이용하려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5장에서는 블레셋이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삼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경외 없이 대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세 장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언약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언약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다루려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셨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경배받으셔야 합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소홀히, 가벼이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가장 존중하고 경배해야 할 대상으로 섬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