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무엘상

(사무엘상 2장) 하나님이 존중하시는 사람

우리본교회 2026. 6. 21. 15:52

https://youtu.be/q3D5tbZyp8Y

 

하나님이 존중하시는 사람

사무엘상 2장

자식이 없어서 마음 아픈 한나, 그에게 남편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가 더욱 그녀를 아프게 합니다.

그 아픈 가운데 한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통곡합니다. 그런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아픔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 가운데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엉뚱한 데 가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통곡하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함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치료자이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결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한나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 피상적으로 알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하고, 체득하고, 경험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알게 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냐? 그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죠.

오늘 읽은 2장 1절부터 10절까지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한나의 개인적인 기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한나의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1. 한나의 기도에 나타난 하나님

한나의 기도는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내 마음은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 뿔이 높아졌다”고 말합니다.

한나에게 뿔이 있어요. 이것은 시적 표현이죠. 시적 표현입니다.

초식동물을 보면 염소, 소, 사슴 같은 동물들에게 뿔이 있습니다. 이 뿔은 힘의 상징입니다. 내 힘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입이 원수를 향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제 할 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구원으로 내가 기뻐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주와 같이 거룩한 분, 주와 같은 반석은 없다. 주님이 최고시다. 주와 견줄 분이 없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교만하지 말라. 오만하지 말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고 다시 일어난다. 풍족한 자는 먹을 것을 위해서 품을 팔게 되고, 굶주린 자는 굶주리지 않게 된다. 임신하지 못했던 자는 일곱 자녀를 낳게 되었고, 많은 자녀를 두어서 자랑하던 자는 쇠약해졌다.

그러면서 6절,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8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아멘.

신앙이란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부한 것, 강한 것, 높은 것, 이런 것들은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순간에 부한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높은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 방식이라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이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것들, 허무한 것들,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라는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 가운데 한나는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승리를 경험함을 통해서 이런 감격적인 기도를 드리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아픔, 우리에게 있는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가운데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 서원대로 하나님께 드려진 사무엘

그러고 나서 11절에 보면 엘가나는 한나와 함께 라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의 집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됩니다.

왜 사무엘이 엘리의 집에서 섬기게 됩니까?

서원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장 11절에 보면, 사무엘을 놓고 한나가 서원합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아멘.

여기서 삭도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칼 또는 면도기입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의 규례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실인은 히브리어 ‘나자르’, 곧 ‘분리하다’, ‘구별하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거기서 ‘나지르’라는 명사가 나오고, 이것을 한국말로 번역하면서 ‘나실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나실인은 무엇이냐면 성별한 사람, 구별한 사람입니다.

이들이 지켜야 할 규례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뿐만 아니라 포도즙, 포도씨, 포도껍질, 하여간 포도에서 난 것은 다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술 취하지 말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긴 머리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표식으로 머리를 기르고 다닌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머리 안 자른 사람이 나오죠. 머리 잘랐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삼손입니다. 삼손이 나실인입니다.

물론 머리카락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머리를 자르지 말라, 삭도를 대지 말라,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나 형제가 죽어도 장례식장에 참석하면 안 됩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아무래도 죽은 사람과 연관된 것들을 만지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를 섬기기 때문에 죽음의 자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실인은 일평생 동안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나실인은 기한을 정하고 1년, 2년 이렇게 할 수도 있지만, 한나는 하나님께 자기 아들을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원을 했어도 남편 엘가나가 허락하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아내가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해도 남편이 “안 된다”고 하면 취소가 되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나 혼자 사무엘을 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가나도 같이 낳았고, 가족 공동체가 함께 책임을 져야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가 서원을 했는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그것도 무효가 됩니다.

왜냐하면 서원이라는 것은 혼자 떠안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책임져야 되고, 그만큼 어떤 헌신을 뒷받침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정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가장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셨기 때문에, 가장이 허락해야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한 여자 또는 과부가 된 여자가 서원한 것은 자기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받았기 때문에, 또한 엘가나의 허락을 받아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3. 여호와를 알지 못한 엘리의 아들들

그리고 나서 12절부터 엘리의 아들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성경은 이렇게 말하면서 엘리의 아들들의 악행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나와 엘리의 아들들이 대조됩니다.

성경은 참 문학 작품으로서도 탁월합니다. 물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배치와 표현을 보면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바로 한나의 기도에 이어서 엘리의 아들들의 악한 행실을 기록합니다.

한나는 그 아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기도를 통해서 아들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았던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고, 가난한 자를 일으키시는 역전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합니다.

체험한 하나님을 노래하는 한나의 기도 뒤에 바로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표현은 여러 방식으로 나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라를 안다”고 할 때 그냥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고,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다’라는 단어를 쓰면 깊이 경험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부관계를 통해서 깊이 아는 것을 표현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할 때 사용된 말이 바로 ‘야다’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막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엘리가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실로에서 가장 권세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만 제사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제사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제사장들을 관리하고 감독하고 일을 맡겨주는 대제사장의 아들로서 그들은 어릴 때부터 성막과 제사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기능적으로 하나님을 알 뿐이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어릴 때부터 계속 다녀도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기능적으로 주일이 되면 헌금을 준비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시간 전에 교회에 가고, 찬양할 때 일어날 때 일어나고 앉을 때 앉고, 사람들을 만날 때는 웃으면서 대하고, 이렇게 기능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예배의 감동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아프고 괴롭고 힘들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함을 받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 문제를 가지고 세상에 가서 풀어보려고 하고, 그것을 잊어보려고 술 마시고, 유흥가에 가고, 엉뚱한 일을 하면서 잊어보려고 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야다’, 곧 경험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고통 가운데, 아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아들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점검해야 합니다.

정말 내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함을 받으려고 하는가?

그래야 하나님을 더 경험하고 알아가게 됩니다.

피상적으로, 기능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엘리의 아들들과 같이 계속해서 엉뚱한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죄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은 나쁜 짓을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일부분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레위기 7장 31절부터 34절을 보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요제로 흔들어 드리는 가슴 부위입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가슴 부위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도 제사장의 몫입니다.

그것은 가져가도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것을 가져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거나 가져갔습니다.

사환을 시켜서 창살을 가지고 와서 고기를 찔러 걸리는 것을 그냥 아무거나 가져간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아무거나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기름, 곧 지방이 사람을 뚱뚱하게 만들고 혈관을 막히게 한다고 해서 안 좋은 것으로 인식되지만, 고대에는 기름이 제일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름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기름은 무조건 하나님께 다 태워 드려야 했습니다.

기름을 태워 드린 후에 그 다음에 고기를 제사장이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먼저 달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안 됩니다. 기름을 하나님께 태워 드리고 가져가십시오”라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폭력을 씁니다.

“맞을래? 그냥 줄래?”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협박과 강압으로 제물을 빼앗기게 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예배를 꺼리게 되고, 위축되고, 예배가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2장 17절은 이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아멘.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예배를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누가 나옵니까?

18절에 사무엘이 또 나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있을 때,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5. 영적 암흑기 속에 심겨진 사무엘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사장이 홉니와 비느하스 둘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제사장들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제사장들도 비슷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같이 동조했거나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엘리가 대제사장이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법궤도 메고 갑니다. 그만큼 실권을 잡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실로의 제사가 전체적으로 병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암흑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 엘리 밑에 누구를 갖다 놓으십니까?

사무엘을 갖다 놓으십니다.

씨앗을 심으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무엘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적인 암흑기에 또 다른 불씨를 일으키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가 어수선하고, 세상이 말세처럼 보이고, 악행이 가득해도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배가 멸시를 받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대 속에서 사무엘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를 구원하시기까지 세상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씨앗들을 준비하셔서 악이 제어되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구원해 내시는 일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악하니, 말세가 됐느니, 이렇게 말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충실하게 나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6. 엘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그의 실패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엘리에게 자꾸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회를 계속 무시해 버립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참 문학적이면서도 오묘합니다.

엘리가 처음 등장할 때 어떻게 등장합니까?

사무엘상 1장 9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엘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앉아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길 때는 서서 섬겨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서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퇴장할 때도 앉아서 퇴장합니다.

사무엘상 4장 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궤의 말을 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제사장이 서서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했다가,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앉아서 듣고 놀라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는 것으로 퇴장합니다.

이것은 엘리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성의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소문이 엘리의 귀에 들립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그러지 마라.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다.”

이렇게 말하고 끝납니다.

지금 엘리는 사사이자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면 자식들을 바르게 잡아야 합니다. 자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을 면직시키거나 파면시키거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우유부단하게 대충대충 넘어갑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실로의 예배 자체가 영적인 암흑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심판을 내리십니다. 엘리의 집에 저주를 내리십니다.

7.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그 심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2장 30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나를 무시하는구나. 나를 경멸하는구나. 제사를 그렇게 업신여기고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은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이용해 먹고, 하나님을 세워 놓고, 필요한 것만 빼먹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에 나오듯이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대하시고, 그런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거나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만 하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섬기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가 정말 섬겨야 할 하나님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