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께 여쭙지 않는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 4,000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때,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기들끼리 말합니다.
(삼상 4:3상)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이런 질문이 있고 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사사들이 통치하는 시대에서 왕이 통치하는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앞 세대인 가나안 정복 전쟁을 했던 여호수아 때도 그러했고 다윗 때도 그러했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왜 자신들이 전투에 패했는지 하나님께 여쭈어 봅니다. 하나님은 아간이 여리고성 전투에서 전리품을 도둑질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 주시고 이 문제를 처리하고 나서 다시금 전투를 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싸워야 할지 구체적인 작전까지 알려 주셔서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하나님이 직접 작전까지 일러 주셔서 전쟁에 승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시기에는 여호와의 제사가 멸시를 받고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영적 암흑기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왜 전투에 졌는지 왕이신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만 전쟁을 하려는 사람들의 악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 않고 그들이 생각해 낸 방법이 이것입니다.
(삼상 4:3하)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를 가져와 그 언약궤를 앞세워 싸우자는 것입니다. 앞선 세대 여호수아 시대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닫자 흐르던 요단강 물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리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마른 땅 같이 건넙니다. 또, 크고 강한 성 여리고성을 언약궤를 앞세워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언약궤에 이상한 능력이,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언약궤만 가지고 오면, 언약궤만 앞세우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2. 언약궤와 십자가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지으라고 하신 성막, 그 곳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는 지성소이고 이 곳은 일년에 단 하루 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죄를 속죄하기 위해 들어갈 수 있었던 장소입니다. 이 곳에 놓인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리고 이 성물은 하나님의 성품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그 주위를 금으로 둘러쌓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기록한 십계명 두 돌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덮는 상판을 속죄소로 이름하고 속죄소에는 그룹(천사)의 형상이 놓여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궤(상자) 안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이 놓여져 있고 그 궤(상자)의 위, 뚜껑 윗 부분을 속죄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과 속죄가 항상 함께 있는 형태인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 내용을 열 가지로 정리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나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십계명,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 선, 절대 의,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든 도덕, 윤리, 선의 기준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속이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죄인임을 고백을 하게 됩니다.
다른 9가지 계명은 겉으로 지킨다해도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마음의 죄인데 우리 안에서 탐내는 마음이 있기에 결국 죄인으로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죄인으로 들어 나느냐? 아담으로부터 죄의 피를 물려 받아 태어 났기 때문에 결국 숨기고 눌러보려 하지만 결국 죄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을 의롭다 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그냥 모른척 눈 감아 주시고 넘어가 주시지 않습니다. 죄는 죄라고 말씀하시고 그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궤에서 십계명 돌 판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속죄소입니다. 일년의 하루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위해 수송아지의 피를, 그리고 나서 백성의 죄를 위해 염소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죄소를 시은좌라고도 부릅니다. 은혜가 주어지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이 두 가지가 만나는 곳, 항상 함께 하는 곳이 바로 언약궤인 것입니다. 바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성품을 너무나 잘 보여 주는 곳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십자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길 원하시지만 그 반면 죄는 벌하여야 하고 그 댓가를 치르게 하셔야 합니다. 왜 꼭 그래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죄 없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형벌 받을 자를 그냥 용서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죄의 값을 반드시 치르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또 한 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죄 값대로 우리의 완악함 그대로 형벌하지 않고 용서하시고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해서 그 십자가 형틀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용서와 자비, 구원을 베풀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와 언약궤 모두 공의와 사랑, 공의와 자비가 머무는 자리,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자리입니다.
3.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언약궤만 앞세운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가나안 사람과의 전투에서 패했는지?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여쭙지는 않고 단지 지성소에 모셔져 있는 가장 거룩한 성물인 언약궤만 앞세우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옵니다.
3절 말씀 가운데 보면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구원을 얻자!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언약궤를 전쟁에서 이기게 하는 도구로, 도깨비 방망이처럼, 이것을 사용해서 이겨보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구화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돼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도구가 아닙니다. 마치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인, 내가 급할 때 나타나서 날 도와주는 해결사, 내가 위험하고 어려움에 처할 때를 위해 들어 놓는 보험 으로 하나님을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고의 목적, 최고의 사랑과 공경의 대상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의 왕이자 우리의 주인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다윗, 그에게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통해 존귀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언약궤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요단 건너편 마하나임으로 피난 갈 때 일입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언약궤를 메고 따라 나섭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들에게 언약궤를 원래 있던 자리에 모셔 놓으라고 지시합니다.
(삼하 15:25-26)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언약궤를 메고 가면 그 언약궤를 통해 자신이 보호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피난지로 옮겨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피난 간다고 하나님의 언약궤까지 메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 가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자신을 다루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그 것을 받아 들이고 고생의 길로 나아갑니다. 혹, 하나님이 나를 다시 회복시키시면 돌아와서 그 언약궤를 볼 것이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맘대로 이동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놓여 있어야 할 그 자리, 그 곳에 언약궤가 놓여 있게 합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은 중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섬기고 예배하고 존중히 여길 대상으로 여겨야지 나의 필요에 의해 이리 저리 끌고 다니고 나의 시중 들고 방패와 도구로 사용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적절한 신들을 만들고 그 신을 잘 달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안됩니다.
오히려 우린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린 그 말씀에 100% 순종할 수 없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하나님도 그걸 아십니다. 그 걸 아시면서 왜 십계명, 말씀을 주시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좋은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아닙니까?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지 못하고 부지중에, 연약하여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속죄소, 시은좌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따라야 할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십계명,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이 이들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해 내시고, 홍해를 가르고 건져 내시고 나서 시내산에 이르러 이들이 자유의 몸이 된 이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후, 이들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너희들은 내 백성이니까.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내 백성이 사는 방식이다” 라고 하시며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대한민국 백성은 대한민국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군인은 군법을 지키는 것이고 학생은 학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학칙을 지킨다고 학생이 되지 않고 군법을 지킨다고 군인이 되지 않습니다. 군복을 입고 다닌다고 군인이 되지 않습니다. 국방부의 부름이 있어야 군인이 됩니다. 학적이 있어야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4. 전쟁에 패한 이스라엘-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지고 나갑니다. 그 언약궤를 실로에서 지키고 있던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홉니와 비느하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던 그들이 전쟁터까지 언약궤를 끌고 나갑니다. 하나님이 이들에 의해 납치되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호락 호락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인질로 끌고 가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노아 가족 여덟 명과 방주에 탄 동물 외에 모두 다 쓸어 버리시는 진노의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너무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들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라고 그냥 어물쩡 넘어가시지 않으십니다. 그 죄에 대해 보복하시고 복수하시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조차 이방인의 군화발에 짓밟히게 허락하시고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눈 앞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까지 끌려가 이방 땅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블레셋과 전쟁을 치렀지만 거기에 하나님은 안계셨습니다. 하나님을 납치해서 끌고 갔지만 하나님은 거기에 안계셨습니다. 하나님을 여쭙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3만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죽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엘리도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들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소식을 들은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고는 죽어 버립니다. 이가봇 אִי־כָבוֹד 카보드는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거기에 부정어 이가 들어가서 이-카보드 영광이 없다. 영광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삼상 4:21-22)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삼아 자기 필요에 따라 여기 저기 끌고 다니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존중히 여기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 이가봇- 영광이 떠난다.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비극이 생긴다.
5. 그래도 소망이 있다.
그래도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궤를 다시금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뒤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하나님을 우상 정도로 이용해 먹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할 줄 모르시고 자기 백성을 찾고 또 찾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자존심 다 버리시고 낮고 천한 베들레헴 구유로 오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또한 엘리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무능하고 비둔하고 엘리 제사장, 그를 폐하시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우셔서 다시금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이 후에 블레셋을 크게 이기는 승리를 주십니다. 이 모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결국은 승리를 주십니다. 영적 암흑기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사랑의 실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드려야 할 합당한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설교 > 사무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무엘상 5, 6장) 돌아오신 하나님, 경배받으실 하나님 (1) | 2026.07.19 |
|---|---|
| (사무엘상 3장) 말씀하시는 하나님 (0) | 2026.07.01 |
| (사무엘상 2장) 하나님이 존중하시는 사람 (0) | 2026.06.21 |
| (사무엘상 1장) 아픔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0) | 2026.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