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2026년6월14일 주일예배 설교
삼상 1장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엘가나는 에브라임 땅에 살고 있었을 뿐이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레위인입니다. 레위인들은 12지파에서 제공하는 48개 성읍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엘가나는 레위인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대상 6:33에 보면 찬양 사역자들(성가대원들)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의 아들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쭉 올라가면 레위인 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상 6:33-38) “[33]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그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34]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라”
그런데 레위인이 아내를 두 명이나 데리고 살아도 되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는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한 집에 두 여자가 있으면 평화롭지 못하고 다툼이 일어나고 불행해 집니다. 그런데 왜 엘가나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을까? 그것도 레위인이면서. 그리고 그가 매년 마다 실로까지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을 보면 나름 경건한 삶을 힘쓴 사람 같은데... 그 이유는 오늘 한나를 괴롭게 한 그 이유입니다.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자식이 없으면 그냥 없나 보다. 하나님이 안 주시나 보다 하고 넘어갈 문제이지만, 그 시대에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습니다.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둘째 부인인 브닌나를 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브닌나가 엘가나에게 자식을 낳아 주었지만 엘가나는 여전히 한나를 사랑하고 그녀를 더 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엘가나는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을 성전에 봉헌 할 때 보면 수소 3마리를 예물로 바치는 것을 보면 나름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에서 남편의 사랑을 듬북 받는 한나 그러나 그녀에게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 아픔은 바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 뿐만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겉으로 보면 다 멀쩡해 보이는데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다 아픔을 만나고 그것을 이겨 나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냥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듯 합니다.
그 아픔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질병으로 아파합니다. 평생 낫지 않고 힘들어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가난으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파합니다. 어떤 이는 외로움으로, 어떤 이는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로 아파합니다. 삶에는 참 많은 아픔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한나 또한 아파하고 있는데 그 아픔은 자식이 없는 것, 그것 자체 만으로도 아프고 힘든일인데, 그 아픈 부위를 계속해서 건드리고 후벼 파는 브닌나라는 여인, 그녀 때문에 더욱 아팠습니다. 그녀는 같은 집에서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사이인데 오히려 원수처럼 한나의 마음에 못을 박는 말만 골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녀를 적수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우릴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닌 가까운 사람이. 그 때의 아픔 또한 견디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청년 때 감리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새벽예배에 나갔는데, 그 교회 장로님 중의 한 분이 맨 앞자리에 앉아서 끙끙 대는 것입니다. 예배 장소가 지하의 마루에 방석 깔고 앉아 새벽예배를 했으니까 뒤에서도 다 들리는 것입니다. 왜 저러지? 그 이유는 목사님과 다툼이 있어서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가시도록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참 대단하다. 새벽예배에 나와서 말씀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목사님 예배 인도하고 계시는데 끙끙 거리며 앉아 있는 저 장로님도 참 대단하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배 시간에 그러고 앉아 있는 성도를 보면서 설교를 하고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그러고 앉아 있는 것이겠죠. 그 목사님 또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시니 괴로워도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계신 것이겠죠.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면 참 힘듭니다. 특히 한 쪽이 못되게 굴면 당하는 사람은 굉장히 힘듭니다. 저는 그런 교회보다 작은 교회에서 그냥 맘 편히 말씀 전하고 예배하는 것이 백배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힐 때 참 힘이 듭니다.
브닌나는 고의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한나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6절과 7절에 두 번이나 심히 격분시켰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히브리어는 반복된 표현은 강조입니다. 그러니 한나는 울고 먹지 않습니다. 밥 맛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속이 너무 상합니다. 남편이 위로하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아픔을 주신이가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에 두 번이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히브리어에서 반복된 표현은 강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나의 이 아픔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아픔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떨 때는 하나님께 섭섭할 때도 있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처럼 “아픔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고통을 주고 어떻게 하나 보자 관찰해 보기 위해 아픔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픔을 주시는 이유)
하나님은 때로 아픔을 통해 우리를 낮추시고,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파 보아야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아파 봐야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아프지 않으면 사람이 기고만장해져서 자기의 위치를 모르고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이 다 옳은 줄만 압니다. 실패해 보고 넘어져 봐야, 또 그렇게 넘어져 아플 때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보게 됩니다.
그 때가 되어야 마음이 높았을 때는 깨닫지 못하던 것이 깨달아지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또한 아파봐야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아픔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 있는 사람의 고충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사는 사람은 외로운 자의 고독과 외로움과 쓸쓸함을 알지 못합니다. 젊은 사람은 노인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가 신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깨어지고 나서야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 5:3-4)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어린 아이가 천방지축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를 치다가 그러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 피가 나면 그 때서야 부모를 찾습니다. 그리고 부모 무릎에 조용히 앉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부모의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한나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아플 때 한나가 한 일)
그런 한나가 지금 한 일은 무엇입니까? 이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올라갑니다. 왜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그녀의 아픔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난 후 그녀가 한 기도
삼상 2:2, 6,7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 이 문제의 답을 알려 주시는 분, 그러한 능력이 있는 분에게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지수를 잘 못 찾아가면 고생만 심해집니다.
1)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된장 바르고 김치 바르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줄여 주는 진통제만 먹고 견디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라파 : 치료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치료자 되십니다.
2) 해결자, 구원자, 도움을 주실 분을 찾아가야 합니다
시편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3) 그리고 아픔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 그 처방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이 쓰다고 먹지 않으면 낫지 않습니다. 곪은 부위를 째고 고름을 짜 내고 소독을 할 때 아프더라면 도망치지 말고 참고 견뎌야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아픔은 결국 사무엘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한나는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통곡함으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란 아들을 얻었습니다. 사무엘의 이름의 뜻은 [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שָׁמַע (샤마) : 듣다
אֵל (엘) : 하나님
즉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사무엘은 한 여인 한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사사로써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모세와 같은 중보자로 하나님께 백성을 위한 간구하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써 백성을 이끌고 초대 왕인 사울과 다윗을 세워 왕국 시대를 잇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한나의 아픔은 결국 사무엘을 낫기 위한 진통이었던 것입니다. 한나가 아프지 않았다면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시키지 않았다면 한나는 가난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아픔을 통해 결국 사무엘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픔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낮추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한나는 왜 자신이 불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돌아보니 그 눈물은 사무엘을 낳기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아픔을 통해 이스라엘을 살릴 지도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도 결코 헛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이 17세의 나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 13년 동안이나 갖은 고생다한 것은 야곱의 가족을 살리고 많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아플 때, 힘들 때, 눈물 날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가장 고통 받으시고 아파 아파하셨던 분 아래에 가서 그 분을 올려다 보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어디입니까? 십자가 아래에 가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올려다 보는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셔서 얼굴에는 피가 흘러 내리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온 몸에 채찍 맞으셔서 피가 흘러 내리며 온 몸이 체중으로 축 내려 앉으시며 아파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분이 왜 저렇게 아퍼하시는 것인가? 바로 우리 때문에, 나 때문에. 나를 살리기 위해 죄 없는 분이 대신 아파하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 죄 값을 치르셔야만 우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아픔을 담당하신 것이죠.
이사야 53:5-6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린 위로를 얻게 됩니다. 나만 아픈 것이 아니구나! 주님도 저렇게 이 땅에 계실 때 아파하셨는데, 저런 고통도 당하셨는데.... 그것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죄값 치러 주셨는데..... 그 주님을 올려다 보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바라 볼 때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주어지고 새 힘이, 위로가 주어질 것이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아픔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 엉뚱한 데로 가지 말고 참 의사되시고 도움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나를 깨뜨리시고 낮추시고 내 귀를 여시고 바른 길 가게 하기 위한 아픔일 수도 있고 오늘의 한나처럼 이 과정을 통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로 감당해야 할 아픔 일 수도 있습니다. 아픔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 아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다 보며 주님이 주신 은혜로 넉넉히 이겨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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