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룻기

(룻기 설교 3) 기업 무를 자 보아스

우리본교회 2026. 5. 25. 22:04

https://youtu.be/E3rp02RXm_g

 

기업 무를 자 보아스

룻기 4장

오늘은 룻기 세 번째 말씀으로 룻기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룻은 보아스에게 “나의 남편이 되어 주십시오. 나의 기업을 물러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룻기 4장 1절에 보면,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갑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단순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재판이 이루어지고,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매매나 계약이 공식적으로 확정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 일을 개인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성문으로 올라가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처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룻과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일에 있어서 보아스보다 우선권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그 사람을 먼저 부릅니다.

성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아무개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결국 자기 유익을 계산하다가 이름 없는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보아스는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게 합니다. 장로들은 증인이자 재판관이었습니다. 땅을 사고팔거나 중요한 일을 확정할 때 장로들이 그 일을 증언하고 확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보아스가 말합니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희년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땅은 개인의 영원한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와 가문에게 기업으로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맡아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해서 땅을 팔았더라도 가까운 친족이 값을 치르고 그 땅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업 무르기입니다.

“무르다”라는 말은 단순히 장기나 바둑에서 “한 수 물러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는 “가알”이라는 단어인데, 값을 치르고 되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엘”, 곧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가난해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땅을 값을 치르고 다시 사서 원래 가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 가까운 친족은 “내가 무르리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엘리멜렉의 땅을 사서 나오미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나이가 많으니, 나오미가 죽고 나면 그 땅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그 땅을 무르는 날에 죽은 자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함께 맞아, 죽은 자의 이름을 그 기업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그 사람은 바로 물러섭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무르지 못하겠노라.”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을 때는 하겠다고 했지만, 손해가 따를 것 같으니 포기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일을 매우 지혜롭게 처리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조건을 한꺼번에 말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기업 무를 책임을 인정하게 한 후, 그 책임이 단순히 땅만 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이름과 기업을 이어 주는 데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기업 무르기 제도와 계대결혼법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25장에 보면,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때 그 형제의 아내를 맞아 아들을 낳게 하고, 그 아들이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는 법이 나옵니다.

엄밀히 말하면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야 할 법적 의무가 없었습니다. 가까운 친족이기는 하지만 친형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율법의 최소한만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오미와 룻이 진정으로 회복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땅만 사 준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이 이어져야 했고, 룻에게서 태어날 아들을 통해 그 기업이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가까운 친족은 자기 손해를 계산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는 자기 돈으로 땅을 사야 했습니다. 그 땅은 결국 룻이 낳을 아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또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 자기 가정 안에서도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재산을 나누는 문제도 생길 수 있고, 가족들의 원망도 감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보아스는 이 일을 선택했습니다.

왜입니까?

인애 때문입니다. 헤세드 때문입니다.

헤세드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손해를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를 위해 자기 재산과 권리를 희생했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인애를 통해 나오미는 회복됩니다.

룻기 4장 14절과 15절에 보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한때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 곧 괴로움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의 인애를 통해 나오미의 삶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셨고, 그녀의 노년에 위로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룻기 마지막에는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의 끝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모두가 자기 유익을 따라 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가운데 룻과 보아스는 달랐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를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애를 통해 오벳을 태어나게 하셨고, 오벳을 통해 이새가, 이새를 통해 다윗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룻기는 단순한 한 가정의 회복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기업 무를 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속량자, 우리의 구속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 “주님, 나를 구속하여 주십시오. 나를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도 룻처럼, 보아스처럼 살아야 합니다.

자기 유익만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해가 있더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책임지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인애를 통해 나오미가 회복되고, 오벳이 태어나고,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열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작은 순종과 사랑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귀하게 사용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을 누리고, 또한 보아스처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