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3:6-10)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오늘은 룻기 2~3장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나오미는 모압땅에서 다시금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베들레헴은 בֵּית לֶחֶם “떡집”, “빵의 집”입니다. 벧세메스는 בֵּית שֶׁמֶשׁ “태양의 집”
벧엘 בֵּית־אֵל “하나님의 집” 여기서 공통으로 들어가는 בֵּית (베이트) 는 “집(house)”이라는 뜻입니다. 이 떡 집에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떡집이란 이름의 동네에서 떡이 없어서 떠났던 나오미가 하나님께서 다시금 자기 백성에게 떡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나오미 –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마라 – 괴로움,쓰다” 라고 불러 달라고 합니다.
자,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그녀를 다시금 기쁨으로 이들을 회복시키시는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연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다.
(룻 2:3-4)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우연히와 마침
① 2:3에 보면 “우연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모르고 갔으나 알고보니~ 이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룻기 전체를 읽어보면, 사실 독자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룻이 간 밭이 하필 보아스의 밭이었고 보아스가 마침 그때 베들레헴에서 왔다.
룻기 2:3의 “우연히”는 “인간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② 마침 (2:4) וְהִנֵּה
“보라!”, “마침!”, “그런데 보니!” 입니다.
“우연히” 이르렀는데, “보라! 보아스가 왔다!”
룻이 이삭을 줍고 있는데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연히, 그런데 마침 그 때. 이런 식이죠.
우리본교회 예배처소 구한 과정
우리본교회가 처음 기도처소를 구하려고 옆 공원 앞에 이삿짐 센터가 나가고 임대를 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습니다. 저는 출근을 해야 했고 박사모님이 복덕방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건물주가 안타깝게 교회에는 임대를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교회가 찬송을 하니 시끄럽워서 그렇다고 하시면서 북원 중학교 앞에 가면 우리본교회가 있는데 지금 예배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 복덕방에는 내놓지 않았는데 거기 한 번 가보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모님은 이해 하기를 지금 말씀하시는 복덕방에 내 놓지 않고 다른 복덩방에 내 놓은 것으로 이해하고 교회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은 복덩방에 내 놓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장님의 말씀은 우리 복덕방이라는 것이 복덕방에 내 놓지 않았다는 것인데 우린 다른 복덕방에 내놓은 것으로 오해하고 목사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전에 목사님은 이 곳에 교회 인테리어를 다 하고 10~20명 가량 모여 예배하다가 바로 코로나가 터져서 못 모이고 있었고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말씀하시면 누가 교회 예배당으로 쓸 사람이 있으면 인계해 주고 고향 교회로 임지를 옮기려 하려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하시며 어떻게 알고 왔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 이 곳 교회 예배당을 인수 받아 예배한 지 다음 주면 2년이 되어갑니다. 이 또한 우연 같고 대화의 오해였던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오해까지도 사용하고 계셔던 것입니다.
저희는 처음 교회당을 준비할 때 건물 하나 빌려서 하나 하나 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는데 그렇게 했으면 과연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주중에는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데 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예배당이라도 하나님이 다 꾸며 주셨으니까? 이렇게 편안히 예배에 집중할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연히 라고 말하지만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룻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룻이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의 밭까지 이르게 되고,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마침 보아스의 눈에 띄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린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여러 상황 가운데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하고 낙담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 그 일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룻은 시모를 위해 보리 이삭을 주어 공궤하는 일 그 일에 충실했습니다.
보아스는 보리를 베는 자들에게 물어 봅니다. 이 소녀는 누구냐? 사환이 대답합니다. 모압소녀이고 나오미의 며느리이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이 것을 가지고 시모를 먹여 살린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아스른 룻에게 말합니다. 다른데 가지 말고 내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 내가 소년들에게 너를 건드지 말고 하였다 그리고 목마르면 소년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거라! 보호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호하는 이유가 네가 네 시모에게 한 효에 대해 듣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기 위해 온 것을 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며 점심 식사 자리에서 초대해 함께 밥을 먹도록 배려합니다. 그리고 사환들에게 곡식을 벨 때에 단에서 곡식을 뽑아 버려서 룻이 더 많이 주어 갈 수 있도록 지시합니다.
보아스는 후덕한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고 율법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레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죠. 자기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모에게 인애를 다하는 룻에게 인애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날 룻은 보리 한 에바를 주워 나오미에게로 돌아갑니다. 한 에바는 22리터입니다. 적지 않은 양입니다. 그리고 나오미에게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 합니다. 보아스의 이름을 듣자 나오미는 그가 기업 무를 자 인 것을 알고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다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고엘은 세 가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첫째는, 가까운 친족이 빚을 져서 땅을 팔았으면 그 땅을 다시 사서 친족에게 돌려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흉년이 들고 문제가 생기면 사람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에게도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땅을 팔아 먹은 거죠. 왜? 어려우니까? 그럼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다시 사서 엘리멜렉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둘째로, 땅이 없이 빚을 많이 지면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이 때도 가장 가까운 친족이 대신 돈을 지불하고 그를 사서 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친족이 까닥없이 피를 흘리에 되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면 친족이 가서 복수를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말하는 고엘이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기업 무를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의무를 잘 할까요? 하지 않으려 할까요? 보아스는 이 의무를 행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하기도 하고 모른척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율법으로 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자 사는게 아닙니다. 서로 서로 돕고 함께 살라고 하십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버려 두지 말고, 네가 게을러서 그런거야. 네가 잘 못된 선택을 해서 그런거야.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말고 그를 도와주라는 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우린 이렇게 말하죠. 자꾸 도와 주면 버릇돼.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 해. 그런 말도 맞긴 한데, 성경은 그래도 도와 주고, 그래도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도움을 받은 자, 그 자비가 필요한 자가바로 ‘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7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제자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율법에서 말하는 고엘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온전한 고엘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네가 지은 죄, 네가 갚어. 네가 한 선택이니 네가 값을 지불해.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대신 값을 치르시고 희생하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의 땅과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생명을 되찾아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 사탄을 대신해서 싸워 주셨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보아스의 계보를 통해 예수님이 베들레헴 떡 집에 오십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인 것을 알자. 그에게 소망을 둡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계속해서 룻이 주워오는 이삭에 룻과 자신을 담보할 수는 없지요. 나오미는 소망을 가지고 보아스에게 기업무를 자의 의무를 행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우선 룻에게 다른 밭으로 이삭을 주우러가지 말고 계속 보아스의 밭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추수가 끝나고 타작을 시작할 때, 타작 마당에서 보아스가 잠을 잘 때 그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직접적으로 남편이 되어 달라.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행해 달라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룻도 이런 나오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인데 순종합니다. 나오미의 말대로 룻은 순종합니다.
베들레헴의 타작마당. 보리를 추수한 뒤에 보리 줄기를 모아 와서
타작(threshing)을 통해 이삭에서 알곡을 떨어내고 키질(winnowing)을 해서 껍질이나 겨 같은 가벼운 것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무거운 알곡만 남기는 작업을 하던 장소가 “타작 마당”입니다. 당시에는 보통 바람이 잘 부는 높은 곳이나 평평하게 다져 놓은 공터에서 이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저녁이나 밤에 바람이 잘 불 때 키질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룻기 3장에서 보아스가 밤에 타작 마당에 있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죠.
(룻 3: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타작마당은 흥겨운 자리입니다. 보아스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 끝에 눕습니다. 그런 그의 발 아래에 이불을 들고 한 여인이 들어와 눕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놀랍니다.
(룻 3: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룻 3: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나의 남편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은 기업 무를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지금 룻의 남편의 형제들이 없고 당신이 그와 가까운 친족이 때문에 나와 결혼해서 아이도 나아 주고 팔아 먹었던 땅도 다시 사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룻 3: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의 인애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한 인애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그녀의 인애는 무엇입니까? 자기 고향, 자기 가족, 익숙한 삶을 버리고 시모를 돌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 제목이 “믿음과 인애로 베들레헴에 온 룻” 이었는데, 이렇게 늙은 시모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으로 따라 온 것 그것이 바로 룻의 첫번째 인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익숙한 자리를 버리시고 하늘 영광, 자기 고향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 떡집으로 오신 인애, 그것도 말구유에 아기로 뉘이신 인애. 그 인애를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것이죠.
그럼 보아스가 말하는 나중 인애라 무엇입니까? 바로 앞에 말,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라였으니” 바로 자신의 결혼을 포기해서까지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주려하는 것입니다.
지금 룻은 자기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려고 보아스에게 남편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룻의 남편이 되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보아스의 아들이 아니라 엘리멜렉의 가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룻은 자기의 결혼을 희생해서 나오미의 집안과 죽은 남편의 이름을 이어주려는 마음으로 자기유익을 포기하고 가문의 회복과 시모의 회복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문화로는 참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결혼은 개인의 행복과 사랑 그리고 자율적 선택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과거의 정략적인 결혼은 개인의 자유와 감정을 희생시키는 측면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젊은 여성이 사랑하지 않는 늙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한다? 그런 드라마가 지금 시대에는 호흥을 얻기 힘들겠죠.
룻은 결혼한지 10년후 과부가 되었으니 그 때 15-17세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면 25~27세의 여인이라고 볼 수 있고, 보아스는 그에 비해 사뭇 나이가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추수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일꾼들을 관리하고 법적 절차도 신속히 처리하고 타작마당에서 직접 나와 잠도 할 정도면 완전히 쇠약한 노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확한 그들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롯은 사랑과 낭만을 쫓아 젊은 여인으로 젊은 남자를 쫓아 시집을 갈 수도 있었을텐데 자신의 결혼까지 희생하며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보아스에게 남편이 되어 주고 기업을 물러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룻은 자기의 행복이나 젊은 사랑을 쫓지 않았습니다. 젊은 남자를 찾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언약 질서 안에서 나오미 가문을 살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룻의 처음 인애는 나오미를 떠나지 않는 사랑, 효 였고, 나중 인애는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뜻과 가문의 회복을 먼저 둔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자기 고향을 떠난 베들레헴 떡집에 오신 인애를 베푸셨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뜻과 많은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데 자신의 희생한 인애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인애를 베푼 룻이 희생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녀에게 보상을 해 주십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게 하셨고 메시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보아스를 통해 낳은 아들로 인해 환하게 웃고 행복해 하는 나오미를 보게 하였습니다. 보아스를 통해 현숙한 여인이라 존귀함을 받게 하였습니다. 나이든 보아스와의 결혼생활이 젊은 남자와의 결혼 생활보다 못하리라고 우리 예단하기 힘들것입니다.
룻기에서 보여 주는 것은 룻의 처음 인애, 그리고 나중 인애로 인하여 공허하고 텅빈 인생 가운데, 마라, 쓰고 괴로움의 인생 가운데 다시금 채워지고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잠깐의 즐거움, 낙, 편안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다시 회복과 치유와 채워짐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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